「현지조사」:청취의 의미와 방법

정혜경씨의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과 함께 한 기억 찾기(1997-1998) 」에 대해서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

 

머리말

1, 기슈 광산의 진실을밝히는 회의 걸음과 회의 기본적 자세

2, 증언자와 청취자의 공동 작업

3, 경솔한 사실 오인, 애매한 기억 혹은 허언, 또는 비방·중상

4, 증언을 들은 자는 들은 책임을 진다

5, 증언의 공개와 공유

6, 공동 조사의 방법과 자세

맺음말

 

머리말

기슈(紀州)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는 지금까지 두번(몇일간) 한국에서 정혜경씨와 함께 청취 조사를 했던 적이 있다.

그 정혜경씨가 근저 「일제말기 조선인 강제 연행의 역사-사료 연구-(경인문화사, 2003 9) 에서「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과 함께 한 기억 찾기」라고 제목을 붙인 소절의 끝에 이렇게 쓰고 있다.

「필자는 구술자료수집작업에서 잘못된 수집방법을 언급할 때에 반드시 두 번의 공동 작업을 예로 든다. 녹취문작성은 물론이고, 평창과 안동의 작업이구술자가 냉장고에 넣어둔 음료수와 같이 언제나 필요할 때 꺼내 먹을 수 있다V는 식의 수집 방법이었다는 아쉬움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309페이지).

 

「‘구술자가 냉장고에 넣어둔 음료수와 같이 언제나 필요할 때 꺼내 먹을 수 있다V식의 수집 방법」이라는 표현은 거의 의미불명이지만「구술자」의 증언을 「냉장고에 넣어둔 음료수」에 비유할 수가 있는 정혜경씨의 감성(사상성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이 여기에는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정혜경씨의 글을 읽어 슬프기조차 했다.

또 정혜경씨가 동행했을 때에 증언을 해 주신 분들, 그리고 그 분들에게 만날 때까지 협력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분들에게  매우 죄송스러게 생각했다.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가 강제 연행·강제 노동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자 해서 행한 한국에서의「현지조사」에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의 회원이 아니더래도 참가한 동료가 이렇게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회에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는 정혜경씨가 동행한 한국에서의「현지조사」때 증언을 해 주신 분들과 신세를 진 분들에게 사죄한다.

 

그 위에서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과 함께 한 기억 찾기」라는 제목이 붙여진 글에 대한 비판을 우리는 행하고자 한다. 그것은 일본에 의한 강제 연행·강제 노동의 역사 해명과 책임 추궁을 위한 한국과 일본 민중의 공동 작업을 조금이라도 깊게 하기 위해서이다.

 

1, 기슈 광산의 진실을밝히는 회의 걸음과 회의 기본적 자세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는1997 2월에 일본 미에(三重)현 기노모토(木本)에서 학살된 조선인 노동자(이기윤씨· 배상도씨)의 추도비를 건립하는 회를 모체로 하여 결성 되었다.

이 결성 집회에는 한국에서부터 홍종필선생이 참가했다. 회 창립은 「동아일보」3 1일호에서도 보도되었다( 「기슈 광산 강제 노역 분명하게 한일 학자 시민 20여명 회 결성」」.

미에현 기노모토에서 학살된 조선인 노동자(이기윤씨·배상도씨)의 추도비를 건립하는 회는 1926 1 3일에 이기윤씨와 배상도씨가 기노모토정과 기노모토 경찰이 관여하에 지역 일본인 주민에 의해 학살된 「사건」의 진상을 밝히며 기노모토정(, 쿠마노시)에 사죄시키고 두 분의 추도비를 건립하는 일등을 목적으로 하여 1989 6월에  일본 오오사카에서 배상도씨의 이남 경홍씨를 모시고 결성된 민중조직이다(1).

(1)’木本事件’ 대하여는 김정미「三重縣木本における朝鮮人襲撃・虐殺について(19261月)」、在日朝鮮人運動史硏究会編『在日朝鮮人史研究18號、アジア問題硏究所、1988年、參照.

    미에현 기노모토에서 학살된 조선인 노동자(이기윤씨· 배상도씨)의 추도비를 건립하는 회는 1994년에 이기윤씨와 배상도씨를 추도하기 위한 비석을 쿠마노(熊野)시에 건립했고 이후 매년 11월에 쿠마노시에서 추도집회와 木本事件및 기슈 광산의 조선인 강제연행에 관한 사진전을 개최하고 있다. 또 회보를 39(2003 12 25일부)까지 내고 있다.

 

쿠마노시와 가까운 기와(紀和)정에 있는 기슈 광산에는 1939년무렵부터 당시 일본의 식민지로 되어 있던 조선각지로부터 노동자로서 많은 사람들이 연행되어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기슈 광산에서 일하게 된 조선인은 1000명 이상이라고 추측되는데 그 중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이름과 본적을 파악학 수 있던 것은 기슈 광산의 경영자인 이시하라(石原)산업이1946년에 미에현에 제출한 문서( 「기슈 광산 1946 연 보고서」)에 기재되어 있는 1942년 이후에 강제연행된 875명뿐이다.

기슈 광산에서 목숨을 잃게 된 조선인수는 기와정에 있는 사철에 남아 있는 「과거장」이나 이시하라산업노동조합이 만든 사망자 명부( 「忌日錄」) 등에 의하면 30명을 넘는다.

그러나 「기와정사」(기와정사편찬위원회편, 기와정발행,1993)를 비롯한 이 지역의 지방사에서는 조선인의 강제 연행에 대해서는 거의 기술되어 있지 않다. 기와정에서는 지금도 당시 기슈 광산에서 조선인이 지나치게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던 것을 견문한 사람이 다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다(2).

(2)일본군이 타이인, 버마인, 중국인, 인도네시아인, 마라야인외 영국군·오스트레일리아군·네델란드군·미군의 포로에게 가혹한 노동을 강제하여 다수가 죽은 타이-버마의 「태면철도」공사로 살아 남은 영국군포로 300명이 1944 6월부터 기슈 광산에서 강제 노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현재 기와정에는 기슈 광산에서 죽은 16명의 영국군포로 무덤이 있어 「기와정 지정 문화재」로 되어 있다. 전술의 「기와정사」에도 영국군포로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에서는 회 결성의 준비 단계로부터 기슈 광산에로의 조선인 강제연행에 관하여 기와정에서의 청취 조사나 문서 자료 수집을 시작하고 있었다.

기슈 광산에 연행된 조선인을 찾아서 1996 10월에 사토쇼진(佐藤正人)은 강원도 인제군에 갔고 그 후 1996 12 18- 21일에  김정미와 사토쇼진가 강원도 정선군에 갔다.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 결성 후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발기는 회 회원이 1997 5 1-7일에 강원도 인제군에, 동년 8 8 6-8 10일에 강원도 평창군에, 1998 819-23일에 경상북도 안동군과 군위군에, 기슈 광산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을 찾아 갔다.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발기는 회가 한국에 조사하러 간 이유의 하나는 기슈 광산을 경영하고 있던 이시하라산업과 기와정이 조선인 강제연행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에서 강제 연행된 분들로부터 실제로 당시 상황을 듣고 싶던 것이다.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는 결성 직후부터 기와정 및 기와정 교육위원회와의 교섭을 거듭해 왔고 1998 11월에는 기슈 광산에로의 조선인 강제연행의 사실을 나타내는 자료를 기와정의 광산 기념관에 전시하도록 약속시켰다.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는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현지조사」를 「구술 자료 수집」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을 밝히고 역사적 범죄의 책임자에게 책임을 지게 하는 민중 운동으로서 해 왔다.

일본에 의한 강제연행·강제노동의 역사적 사실의 해명은 조선인과 일본인에 있어서 의미가 다르다. 조선인에 있어서는 자기들의 역사를 밝히고 두번 다시 침략을 반복하게 하지 않기 위한 작업이며 일본인에 있어서는 일본 정부와 일본인의 침략 책임을 따지고 자기들의 역사적 책임의 일단을 다하기 위한 작업이다.

우리 회에서는 일본의 침략 범죄의 역사적 사실을 해명한다고 하는 점에서 일치를 보고 조선인과 일본인의 공동작업이 가능해지고 있다. 회원은 자주적으로 회의 활동에 참가하고 회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회원의 합의를 얻어 진행된다. 이것은 회의 기본 원칙이다.

우리 회에서는 국민국가일본의 침략 책임을 식민지지배 책임, 전쟁 책임, 전후 책임의 세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전후 책임이란 무엇인가. 일본에 의한 아시아 태평양 침략의 제일 책임자인 천황의 침략 범죄를 철저하게 추궁히지 못했었고 천황제를 존속시키고 있는 책임. 「히노마루」「키미가요」 「원호」를 존속시키고 있는 책임. 일본 정부에 식민지 지배 책임과 침략 책임을 지게 하고 사죄시키고 배상시키지 못하고 있는 책임. 일본의 새로운 타지역·타국 침략을 저지하지 못하고 있는 책임등이다.

 

2, 증언자와 청취자의 공동 작업

지금까지 「기슈 광산 1946 연 보고서」에 기재된 조선인중 한국에 본적이 있는 분 의 소식은 거의 더듬을 수가 있었지만 한국에서의 우리의 「조사」는 아직도 불충분한 것이다.

우리는 증언을 해 준 분들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어서 무엇을 하느냐」라고 질문받곤 했다. 우리는 일본에서는 일본의 조선 침략사가 정확하게 가르쳐 지지 않으며 왜곡되거나 또는 숨겨지고 있다는 상황을 설명하고 우리 역량으로는 지금 당장 구체적으로 재판 제기나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우선 사실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을 밝힘에 따라서 일본 지역의 구석구석까지 침투되고 있는 침략 사관을 변혁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일본 정부·군·기업·민중의 아시아 태평양 민중에게 준 침략 범죄에 대한  제대로 된 사죄·배상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협력을 당부했다.

우리는 증언을 들을 때 증언자가 스스로 이야기해 주는 것을 바라고 있다. 증언자가 우리를 신뢰해 주지 않으면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청취 태도에 대해서 정혜경씨는 이렇게 쓰고 있다.

「먼저 현지조사를 시작했던 사토 선생이 윤노인을 만나 강경한 어조로“반드시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역설한 결과, 일행이 도착했을 때 증언은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300-301페이지)

「마치왜 너만 안맞았다고 하느냐는 질책을 넘어서맞았다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치지 않을 태세는 추궁에 가까웠다」(302페이지)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우리는 단언한다.

「사토 선생이 윤노인을 만나 강경한 어조로“반드시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역설」했다고 정혜경씨는 자신이 본 것처럼 쓰고 있지만 사토 쇼진의 그러한 발언을 그 때 아직 현지에 가 있지 않았던 정혜경씨는 어떻게 해서 확인했을 것인가. 여기서 정혜경씨가 말하는 「윤노인」이란 누구인가.

왜 정혜경씨가 이렇게까지 말하는지 우리에게는 알 수가 없다.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는 1998 8월에 한국에서 청취조사를 하기에 2개월 앞서서 해남도의 「조선촌」등지에서 처음으로 현지조사를 하고 청취를 했다. 그 때도 우리는 증언자와의 신뢰 관계를 깊게 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증언을 해 줄지 어떨지 하기 이전의 모랄 문제이다. 청취자가 「바라지 않는 답변을 제한」하거나 「강경한 어조」로 말한다면 증언을 제대로 해 주지 않으려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청취는 증언자와 청취자의 공동 작업이다.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는 1998 6월 이후 지금까지 해남도 각지에서 같은 분으로부터 두번 내지 여섯번 증언을 듣고 왔다. 그것은 증언자와의 신뢰 관계가 없으면 못할 일이다.

 

증언해 주시는 분과의 신뢰 관계는 증언자가 생활하고 있는 지역의 사람들과의 신뢰 관계없이는 깊어지지 않는다. 1996 10월에 사토 쇼진이 혼자서 처음으로 강원도 인제군에 갔을 때 인제읍사무소의 장귀남씨와 기린면사무소의 안호열씨는 자신의 부친을 찾다시피 해서 열심히 기슈 광산에 연행된 사람을 찾아 안내해 주었다. 3 4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서 이 때 사토 쇼진은 기슈 광산에 강제 연행된 4 분과 큐슈(九州), 후쿠시마(福島), 오카야마(岡山)의 탄광이나 조선소에 강제 연행된 4 분으로부터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3, 경솔한 사실 오인, 애매한 기억 혹은 허언, 또는 비방·중상

정혜경씨는 김정미가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의 「회장」이라고 쓰고 있지만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는 「회장」을 두고 있지 않다. 「회장」을 둘지 안둘지 는 회의 조직 원칙과 관계된 것이다.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가 「회장」이나 「대표」를 두지 않는 것은 회원 각자가 회에 대해서 평등하게 책임을 진다고 하는 원칙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하나의 민중 조직을 형성하여 일본에 활동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강제 연행·강제 노동의 체험을 한국에 가서   전지역적으로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한국에서 살고 강제 연행·강제 노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에게 계속적인 조사를 자주적으로 진행시켜 주는 것을 기대해하면서 정혜경씨에게도 역사적인 사실을 밝히기 위한 공동조사를 제안했다.

그 제안에 응하여 정혜경씨는 1997 8월과 1998 8월에 우리 「현지조사」에 참가했다.

정혜경씨는 「잘못된 수집방법을 언급할 때에 반드시 두 번의 공동 작업을 예로 든다」고 말한다. 정혜경씨가 참가한 것은 우리의 한국에서의 다섯번의 「현지조사」 중 두번이었고  그 두번도  정혜경씨는 전행정에는 참가하지 않았다(1997 8 4-10일 중 7-9일까지, 1998 8 19- 23일 중, 19-20일까지).

 정혜경씨는 두번 함께「현지조사」를 다닌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 회원인 사토 쇼진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사토 선생은 본인의 생각과 원칙을 쉽게 바꾸지 않는 분이어서 필자는 내내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거기에 때때로 토해내는 한국사회에 대한 불신감(한국사람들은 거짓말을 잘 하고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여러 표현)은 지나칠 정도여서 일행으로서 친화감에 저해요소가 되기도 하였다」(303페이지).

 

만약 정혜경씨가 쓰고 있는 것과 같은 언동을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 회원인 누군가가 취했다면 우선 회에서 문제로 삼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 전에 현장에서 문제가 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부터 같이 참가한 다른 회원은 사토 쇼진의 이런 언동을 견문하고 있지 않았다.

 정혜경씨의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과 함께 한 기억 찾기」에서의 사토 쇼진에 대한 기술은 동기 불명의 비방·중상이지만 여기서 정혜경씨는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가 민족 차별을 하는 일본인을 회원으로 하여 그 차별자와 함께 활동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에는 몇명의 조선인 회원이 있다. 일본에 정주하는 조선인 회원은 일상적으로 끊임없이 일본으로의 동화 공세가 있는 가운데 일본의 침략 범죄를 밝히는 활동을 하고 있다.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의 일본인 회원이 조선인 차별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일본인과 함께 활동하는 조선인 회원을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차별을 비판하지 못하는  “친일파”라고 중상하는 것이다.

정혜경씨가 어째서 이러한 발언을 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정혜경씨는 자신의 발언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발언했겠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요구는 하지 않지만 정혜경씨가 만일 자신의 사회적 발언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자발적으로 사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조선인 회원인 이재일이나 김정미는 지금까지 여러 장소나 문서로 일본인 역사 연구자나 지식인의 내셔널리즘을 분석하고 비판해 왔다.

 

우리는 한국에서도 해남도에서도 실로 많은 지역에서 많은 분들에게서 도움을 받아서 「현지조사」를 진행시켜 왔는데  그 가운데 특히 박동낙씨와의 만남과 이별은 마음에 새겨 져 있다.

1997 8월에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는 강원도 평창군에 갔다. 「기슈 광산 1946 연 보고서」에 의하면 평창군으로부터 160명이 기슈 광산에 강제 연행되었고 그 중 59명이 「도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 사토쇼진은  다른 조사참가자가 오기 2일전에 미리 평창읍에 가서  혼자서 읍사무소나 군도서관이외에 진부면,봉평면,미탄면,도암면,용평면 각면사무소나 노인회관을 방문했고 거기서 만난 분들에게서 많은 협조를 받았다.

8 6일의 일이었다. 평창군 북부 봉평면의 부면장인 강기룡씨는 마을의 각 집에 전화하고 기슈 광산에 강제 연행된 추교화씨의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그 강기룡씨에게 안내받은 식당에서 사토쇼진은 박동낙씨와 만났다. 박동낙씨는 다음날 7일 아침으로부터 대화면과 진부면의 노인회등을 안내해 주웠다.

그 박동낙씨에게 관하여 정혜경씨는 「일제말기 조선인 강제 연행의 역사」에 「박동낙 선생과 평창」이라는 제목을 붙인 소절을 만들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토 선생은 생존자를 확인하기 위해 들른 면사무소에서 우연히 박동낙선생을 만났다고 한다. 박동낙선생은 떠듬거리는 한국어로 명부의 조회를 부탁하는 사토 선생을 보고 평소 익혀둔 일본어 실력을 발휘해 명부 확인작업을 도와주게 된 것이다」(320페이지).

「‘한국인만이 해야 하는 일을 일본인이 해주니 너무 고맙다V는 순수한 열정에서 조사 작업을 도와주었다. 강제연행의 피해자를 찾는 일이 왜 `한국인이 해야 하는 일V이고, 이런 일을 하는 ‘일본인V에게 감사를 느끼는 것이 잘 못된 생각이 아닌가를 생각하기에 앞서 작업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안도감이 조금 더 강했던 것은 사실이다」(320-321페이지).

「그 해(1997) 말에 ……….( 박동낙 선생이)’교통사고로 돌아 가신지 얼마 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321페이지).

  

이 정혜경씨의 설명은 박동낙씨의 진심을 손상시킬 것이다. 사토쇼진의 조선어 실력은 불충분한 것이기는 하나 박동낙씨는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의 「현지조사」에서 「평소 익혀둔 일본어 실력」에 의하여 협력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또 「‘한국인만이 해야 하는 일을 일본인이 해주니 너무 고맙다V는 순수한 열정에서 조사 작업을 도와주었다」라고 말하는 것도 비논리적인 추량이다.

박동낙씨는 물론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가 조선인과 일본인에 의해 결성 된 민중 조직인 것을 알고 있었다. 박동낙씨는 우리 회의 운동에 공감하여 협동자로서 협력해 주었던 것이다.

박동낙씨와 우리는 1997 8월 이후도 서울이나 평창에서 몇번이나 만나 우정을 깊게 하고 있었다. 박동낙씨는 대기업이 스키장 조성등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것을 못마땅해 생각하고 반대하고 있었다. 박동낙씨는 봉평면이 고향인 이효석의 「메밀 꽃」을 우리가 읽었다고 말했을 때 매우 기쁜 듯했다. 그 후 11월이 가까와지면 이기윤씨와 배상도씨의 추도집회를 마음에 두어 전화를 주웠다. 기슈 광산에서 돌아가신 조선인의 추도식을 기슈 광산에서 하자고 서로 상담하기도 했다. 그 박동낙씨는 1999 1월에 교통사고로 돌연히 돌아가셨다.

 

4, 증언을 들은 자는 들은 책임을 진다

 정혜경씨는 우리에 대해서

「구술자료수집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일본 측 면담자들」(300페이지)

이라고 말하고 있다.

「구술자료수집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해남도에서도 많은 분으로부터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증언에 의해 우리는 계속 숨겨졌을지 모르는 일본의 역사적 범죄를 밝히기도 했다.

「구술자료수집작업에서 잘못된 수집방법을 언급할 때에 반드시 두 번의 공동 작업을 예로 든다」고 정혜경씨는 말한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두고 싶은데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는 지금까지 문서 자료를 모으듯이 「구술 자료」의 「수집 작업」을 해 온 것은 아니다. 

우리는 회의「현지조사」가 완벽하다고는 물론 생각하고 있지 않고 항상 방법적으로도 검증하면서 시행을 반복하여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고 해 왔다.

 

정혜경씨는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일본측 면담자들의 고집스러운 태도이다. ‘기슈광산의 조선인 노동자는 이러 이러했다V는 선입견으로 무장을 했기에 원하는 답변이 제한되기도 했고, 문헌자료 수집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물론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구술자료가 문헌자료의 보완적인 의미에 국한되어 있었고, 특히 보상을 위한 증거 확보를 위해서는 문헌자료만이 실질적인 효력이 있었기 때문이다」(300페이지).

 

 그 때 우리는 한국에 문헌 자료를 찾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정혜경씨도 알고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증언의 과정에서 증거가 될 만한 문서자료의 존재가 밝혀지면 그 열람을 당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기슈 광산에 끌려 갔던 평창의 김형의씨에게서 이시하라산업의 「모집 광고지」를 가지고 있다고 들어서 이시하라산업이 강제 연행을 인정하고 있지 않고, 인정하게 하기 위한 증거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보고 싶다고 당부했으나 거부되었다.

김형의씨가 거부한 것은 일본 정부가 강제 연행·강제 노동의 책임을 지고 있지 않는 상황에서 당시 재판에서 일본 정부에 배상금을 지불하게 한다고 해서 희생자들로부터 재판 「착수금」을 사취한 한국인이 있어 김형의씨가 그 사기의 피해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때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힌다는 의도를 믿어 주지 않는 이상 「모집 광고지」열람 거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며 한국에서 이러한 조사의 의의가 넓리 인정되게 되면 열람도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혜경씨는 「기슈광산의 조선인 노동자는 이러 이러했다V는 선입견으로 무장을 했기에 원하는 답변이 제한되기도 했고……」라는 뜻의 허언을 반복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역사연구나 역사서술의 분야에 있어 증언(oral testimony)은 경시되고 있다. 우리는 일본의 침략 범죄를 추궁하기에는 그 증거가 될 만한 문서 자료가 많이 폐기 또는 소각 또는 은폐되어 온 상황에서 특히 증언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2001 12월에 서울에서 열린 심포지엄 「구술 자료로  복원하는 강제 연행의  역사」(주최:일제 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 진상 규명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추진 위원회)에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 회원인 김정미는 「근현대사 인식과 역사 변혁--기슈 광산에의 조선인 강제 연행·강제 노동의 사실 추구의 과정에서--」라는 제목으로 보고를 했다. 김정미에의  이 심포지엄 참가요청은 정혜경씨를 통해서 왔고  정혜경씨도 참가하고 있었다.

그 때 김정미는, 「근현대사 연구에 있어서의 청취」나 「강제 연행·강제 노동의 경험을 들을 의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한국이나 해남도에서의 경험을 총괄하면서,

「청취는 새로운 만남과 공투의 인연을 발견하는 것이며 현재와 과거를 잇는 새로운 관계를 쌓아 올려 가는 것이다」

고 보고했다. 이 생각은 김정미개인의 것이 아니라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가 지금까지의 조사와 연구경험으로 확신해 온 것이다. 우리는 증언자와 그러한 관계를 쌓아 올려 가는 노력을 거듭해 왔다.

우리 힘이 부족한 것은 우리 자신이 통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야말로 우리는 증언을 해 주시는 분에게 확인하는 일은 있어도 증언을 「제한」하지는 않는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까지의 우리 활동은 이루어져 오지 못했었을 것이다.

2001 12월의 심포지엄 때 김정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인제에서도 정선에서도 평창에서도 그리고 안동,군위에서도 많은 사람이 당시 이야기를 들어서 무엇을 하느냐고 우리에게 물었다. 우리가 만난 전원이 강제연행의 체험을 50수년만에 처음으로 말한다고 하였다.

해남도에서도 우리는 질문을 받았다. 당시 이야기를 들어서 무엇을 하느냐고.

강제연행되고 강제노동에 시달린 사람들. 남겨 가족. 분한테서 증언을 들을 들은 사람에게는 들은 책임이 생긴다. 증언을 얻어서 어떻게 것인가. 무엇을 위하여 구술조사를 하는 것인가.

물음에 대답하는 자세를 가지지 않고서는 증언자에게 다시 상처를 입히게만 것이다.

구술자료를 얻는 것은 역사의 목격자에게서 증언을 얻는 것은 자기가 역사를 배우는가, 역사를 배워서 어떻게 하느냐는 자기에 대한 물음에 이어 지고 있다」.

 

5, 증언의 공개와 공유

정혜경씨는 한국에서의 「현지조사」시에 들려준 증언에 관해 「일본측 참가자 가운데 김정미선생이 간단한 내용만 정리하여 논문에 인용했을 뿐」(309페이지)이라고 사실과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부기, 참조).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는 회원 회비로 운영되어 있으며 전 「증언집」을 낼 수 있는 재정적인 기반이 없고 또 마음대로 발표할 수 있는 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더우기나 유감스럽게도 일본 출판계는 일본의 역사적 무책임함을 반영해서 그렇겠지만 피강제 연행자·피강제 노동자의 「증언집」을 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에서는 한국에서의「현지조사」 보고를 회로서 혹은 개인으로서 회의 모체인 미에현 기노모토에서 학살된 조선인 노동자(이 기윤씨·배상도씨)의 추도비를 건립하는 회 「회보」에서 그때마다 게재했고 또 계간잡지 「파트로네」에서는 한국에서의 모든 「현지조사」 내용을 보고했다.

 

6, 공동 조사의 방법과 자세

 미에현 기노모토에서 학살된 조선인 노동자(이 기윤씨·배상도씨)의 추도비를 건립하는 회는 매년 11월에 가지는 추도 집회때에 「기노모토 터널」·학살 현장·기슈 광산등에서 새로운 참가자와 함께 「현지&